20101129


집에 혼자 있을 때였다. 샤워를 하고 욕실 밖으로 나오려는데 어둑어둑한 집안 어디에선가 쿵쿵쿵 사람 걸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간이 콩알만 해지는 것을 느꼈다. 난 자결을 하던지 놈을 박살내던지 하려고 바디로션 통을 야구 방망이처럼 든 채 문 밖으로 고개만 내밀고 두리번 두리번 집안을 살폈는데, 알고보니 윗 층에서 쿵쿵거리는 소리였다.

Magis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천장과 벽을 닦았다. 언제나처럼. 종종 하는 일이다.(내 팔자야) 꼭 필요해서 하는 일이긴 한데, 보여지기엔 몸개그의 일환이다. 아마 집 밖에서 사람들이 유리창에 비친 나를 보면 "저 여자 뭐하는거지?" 할거다.

11월 들어서부터 무슨 이유에서인지 부엌 살림을 개비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벌써 몇 주째 쇼핑 및 작업중임과 동시에, '결혼 6주년 기념일이 코 앞이고, 난 그럴 자격이 있다'고 속으로 핑계, 자위, 암시를 반복하고 있다. 맨 처음 바꾼 것은 냄비. 신혼 살림으로 마련한, 지금은 누렇게 변색된 Fissler 냄비들을 차곡차곡 포개놓고, Le Creuset 몇 개를 구입했다. 르 크루제를 선택한 이유는, 2008년 초에 처음 구입해 지금껏 사용중인 사과 모양 냄비가 무척 만족스럽기 때문. 1999년 초, Habitat에서 구입한 4인조 양식기도 이제 너무 낡고 지겨워 이번 기회에 구색을 갖추고자 새로 장만했고, 평소 티 타임에 사용할 디저트 양식기도 새로 장만했다. 10년 넘은 양식기는 앞으로 더 편하게 쓰게될듯. 그 외 많은 부엌 도구와 악세서리들을 개비했고, 또 하는 중이다. 나의 그가 깨뜨려 짝이 안 맞는 Riedel 부르고뉴 글라스도 다시 장만하려고 보니 이제 단종되어 못 구한단다. 똑같은 것을 몇 년 전에도 한 번 깨뜨려 추가 구입했던 것인데, 그마저 또 깨뜨렸으니... 그외 그가 깨뜨린 Alessi 워터 글라스도, 파란색 여름 글라스도, RC 머그도 이미 다 없어서 못 구하는 것들. 짝 잃은 내 것들만 남아있다. 내가 오래 전부터 아끼며 사용해온 알레시 티 인퓨저도, Dualit 토스터의 손잡이도 부러뜨리고... 데체 왜! 나의 그는 이렇게 자주 뭔가를 떨어뜨리고, 깨뜨리고, 고장내는지, "참 미스테리합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번 달인 11월에 뭔가 대단한 일을 했어야 했는데, 그냥 놓아버렸다. 포기했다고 해야하나. 아무튼 그러고난 후로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최근 다시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정도. 대단한 사치다.




by songc | 2010/11/29 22:57 | SongC today!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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